손으로 읽는 낙서판

낙서 480. 지혜와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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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용기

 

우리는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없어서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게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달라는 기도보다는 지혜를 달라는 기도를 먼저 해야 한다.

지혜는 용기를 동반한다.

낙서 479.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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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자체를 사랑하기

 

내 글이 너에게 소중하지 않은 이유는 내 글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나의 존재가 너에게 소중하지 않아서이다.

존재의 소중함을 먼저 익히지 않는다면, 그 존재가 표현하는 그 어떤 것도 소중하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사랑은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를 사랑하지 못하면 그 존재를 향한 말과 손짓은 모두 폭력이 될 뿐이다. 존재 자체를 사랑하지 못하겠거든, 존재를 향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폭력을 막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니 사랑의 능력이 없거든, 아무 것도 하지 말라. 그게 오히려 존재를 지켜주는 가장 적극적인 선한 일이다.

낙서 478. 아이들의 천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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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천진함

 

아이들의 천진함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바라거나 넘어설 수 없음을 비로소 수긍할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눈에 보이고, 삶에 새겨지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감사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의 천진함은 물 위를 걷는 기적과도 같다. 이러한 기적(아이들의 천진함을 갖는 일)이 없다면, 오히려 우리는 물에 빠져 허우적댈 것이다.

낙서 477. 관계론적 인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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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론적 인간론

 

너는 네가 아니고

나는 내가 아니다.

너와의 관계 속에서,

나와의 관계 속에서,

너와 나는 또다른 '너'와 '나'가 된다.

영원한 '너'와 영원한 '나'는 없다.

너와 나 사이에 섬이 있다.

너와 나는 그 섬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너와 나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모두

섬사람이고

(자기 존재로부터 새로운 존재로 향하는,

그리고 그 일을 무한히 반복하는)

이민자이다.

낙서 476. 삼위일체의 근본 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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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의 근본 논제

 

삼위일체의 근본 논제는 하나님의 셋 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적 삶을 자기-분화(self-separating)와 재-연합(reuniting), 죽음과 부활로 재정의할 수 있는 역동성에 있다.

ㅡ 테드 피터스(Ted Peters)의 책, <God as Trinity> 중에서

 

기독교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이해하는 이유는 '셋 이 하나, 또는 하나가 셋'이라는 난해한 수학적 명제를 논하기 위함이 아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즉 하나님이 피조물을 향한 자기의 사랑을 어떻게 확증하시는지에 대한 논의를 편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를 통해서 인간과 피조물을 자기 안에 통합시키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어, 인간(피조물)을 끌고 하늘로 올라가서 인간을 자기의 신성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신다.

삼위일체는 (괴상하고 난해한) 수학이 아니라 (사랑의) 구원론이다.

낙서 475. 신앙, 그분의 시선에 압도당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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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그분의 시선에 압도당하기

 

내가 바라보는 게 아니라,

저 너머에서 그분이 나를 바라본다.

신앙이란 그 시선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낙서 474.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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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감사는 머릿속이 아니라

손과 발에 기록해야 한다.

낙서 473. 폭력과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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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저항

 

폭력은 인간의 내면 세계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폭력에 저항하는 이유는 몸을 지키기 위한 것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 세계를 지켜내기 위함이다. 내면 세계 없는 몸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낙서 472. 코이노니아(koino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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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koinonia)

 

코이노니아는 흔히 '교제(fellowship)'으로 번역한다. 코이노니아는 '공동체(community)'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삼위일체론에서 삼위의 공통적인 것을 표현할 때 'koinon(common)'이란 용어를 쓴다. 이는 삼위가 신적인 본성 또는 본질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삼위는 모두 '하나님'인 것이다.

본질을 공유하는 존재는 그 본질에 의해서 존재가 규정된다. 가령 내가 인간인 것은 내가 인간의 본질을 다른 인간과 같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생김새가 다른 인간과 좀 다르더라도 나는 '인간'인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코이노니아(교제)'를 한다. 위의 설명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그 교제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해진다. 교제 시간에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동일한 본성과 본질을 공유하고 있는지 서로 확인해야 한다. 그 동일한(koinon) 본질이란 당연히 한 하나님, 한 예수 그리스도, 한 성령님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교제 안에는 어떠한 차별이나 소외가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수 없다. 만약 교제 안에 차별이나 소외가 존재한다면 그 교제는 이미 코이노니아가 아니라, 인간들의 사적인 '죄된' 모임에 불과한 것이다.

낙서 471. 교회의 기둥, 아타나시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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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기둥, 아타나시오스

 

니케아 신앙, 즉 삼위일체 신앙의 수호자 아타나시오스는 시련과 고난의 삶을 살았다. 로고스론의 종속론과 맞서 동일본질을 지켜내기 위한 그의 노력은 그를 5번의 주교직 박탈, 17년 이상의 유배를 살게 했다.

아타나시오스의 뒤를 이어 동일본질의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킨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아타나시오스를 일컬어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렀다.

시련과 고난을 통해 진리를 전수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진리가 누군가의 고달픈 삶을 통해 이루어진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감사는 물론이요 진리를 지켜내는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야 할 것이다.

진리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사리사욕만 채우려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생명의 고꾸라짐이 있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자체가 생명의 부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