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읽는 낙서판

낙서 460.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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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영성은 무수한 반복과 습관, 거룩한 지루함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길러진다.

낙서 459. 자유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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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사랑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우리는 자유를 어디까지 밀고 나갈 수 있을까?

자유가 죽음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면,

자유는 무한인가, 미련인가.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그 숙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에겐 자유도 없다.

인간에게 진정한 해방은

자유와 죄가 구분되지 않는 시,공간에 이르는 것,

그러한 순간은 오직 사랑할 때 뿐이다.

낙서 458. 시에 마침표를 찍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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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마침표를 찍지 않는 이유

 

숨 죽이며 읽으라고

한 호흡으로 읽으라고

한 세계에만 집중하라고

스스로 호흡을 결정하라고

미련 없이 흘려보내라고

시에는 마침표를 쓰지 않는다

마침표는 너와 나를 갈라놓는 벽이므로

낙서 457. 삼위일체는 교리가 아니라 경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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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는 교리가 아니라 경험이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레오나르도 보프의 진술이 참 마음에 든다.

 

삼위일체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교리가 아니라 하나의 경험이다." (삼위일체와 사회)

 

정말 맞는 말이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할 수밖에 없다. 성경은 그 경험에 대한 진술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 사건(구원 사건)을 언제나 삼위일체 사건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통하여(through)여 성령 안에서(in) 행하신다. 우리는 경륜적(economic) 삼위일체를 통해 내재적(immenant) 삼위일체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신비 그 자체다. 삼위일체는 교리가 아니라 경험이다.

낙서 456. 의미는 힘의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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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는 힘의 작용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에서 '의미'가 어떻게 생성되는 지 논한다.

ㅡ 모든 힘은 다수의 현실의 소유, 지배, 이용이다.

ㅡ 동일한 대상, 동일한 현상은 그것을 소유하는 힘에 따라서 의미가 변한다.

ㅡ 모든 정복, 모든 지배는 새로운 해석에 상응한다.

ㅡ 의미가 다수가 아닌 그 어떤 사건, 현상, 말, 생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장에 눈이 머문다. 위와 같은 말을 하는 이유는 다음의 주장 때문이다. "하나의 현상이란 외관이 아니며, 결코 출현도 아니지만, 실제적인 힘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기호이며 징후이다"(20쪽).

 

의미는 그 자체로 생성되는 게 아니라, 실제적인 힘 속에서 생성된다. 어떠한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힘의 작용이 된다. 결국 힘 있는 자만이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미를 생성해 내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누가 힘을 가지고 있느냐는 문제와 어떻게 그 힘을 갖게 되느냐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의미 없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사람들은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을 가지려고 애쓴다. 그리고 의미를 만들어 내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친다.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 우리는 그것을 권위라고 부른다. 결국 이 세상은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 즉 권위를 차지하려는 원형경기장과 같다.

낙서 455. 나(je)와 자아(moi) 사이에 있는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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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je)와 자아(moi) 사이에 있는 벗

 

차라투스트라는 말하길, 벗은 항상 나(je)와 자아(moi) 사이의 제 3자인데, 살아가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나를 극복하게 하고, 극복되게 하는 자이다.

ㅡ 들뢰즈, <니체와 철학> 중에서

 

이러한 벗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인생에서 이러한 벗을 한 명만 만나도 인생은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벗이 항상 동일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인생의 순간마다 벗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벗을 향해 항상 마음을 열어 두는 것이 좋다.

인생의 벗을 꼭 만나게 되길!

 

* 나(je)는 데카르트가 말한 의식하고 사유하는 주체를 말하고, 자아(moi)는 프로이트의 에고(ego), 즉 무의식으로서의 나를 말한다.

낙서 454. 세례와 적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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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와 적막

 

자는 자여 깨어나라

죽은 자들 가운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리라

(엡 5:14)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세례식 때 경험한 새로운 생명으로의 부르심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세례식 찬송을 동원한다.

 

세례식은 세례 받는 당사자뿐 아니라, 세례를 이미 받고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일원이 된 사람들의 세례를 회상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세례식에 참여한 교회 공동체는 세례식을 통해 그동안 무디어진 신앙의 결을 다시 세우는 기회를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세례식이 자주(적어도 일년에 한 번, 부활절 때) 있는 것이 신앙의 정진에 큰 유익이 된다.

 

그러나 요즘 교회에서는 세례식을 거행하는 교회가 줄어들고 있다. 새로운 신자가 없기 때문이요, 교인의 수평 이동이 잦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마치 교회가 새로 태어난 아기가 없어 아기의 울음 소리를 들어본 지 오래된 시골 마을 같이 변한 것과 같다.

 

아기의 울음 소리가 없는 시골 마을은 기쁨이 없고 적막하며 지루하기만 하다.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재에 대한 의지가 박약하다. 그저 따분한 일상만이 마을 중앙의 고목 나무처럼 버티고 서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마을의 인구는 점점 줄어 만 간다.

 

요즘 교회가 딱 그것과 같다. 기쁨이 없고 적막하며 지루하기만 한 교회를 누가 다니고 싶겠는가. 그러므로, 교회가 생명력 있는 공동체로 살아나려면 세례식이 끊이지 않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은 현대 교회 공동체의 준엄한 과제이다.

낙서 453. 인식과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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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과 행위

 

인식은 행위를 죽인다.

환영에 의해 베일이 드리워진 상태가 행위에 속한다.

진정한 인식, 무서운 진리에 대한 통찰이, 햄릿뿐만 아니라 디오니소스적 인간에게도, 행위를 재촉하는 모든 동기를 압도한다.

ㅡ 니체, <비극의 탄생> 중에서

 

이런 문장을 만나는 것은 축복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이러한 축복을 누린다는 게 감사하다. 오늘 밤, 잠은 달콤할 것 같다.

 

나는 무엇을 인식하고 있으며 무엇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가.

진리를 인식하고 나면 더 이상의 행위는 "우스꽝스럽거나 치욕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지금 내가(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이다. 그러니, 진리 안에 있는 존재가 보기에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진리 안에 거하고 있지 못한 나는(우리는) 얼마나 치욕스러운가.

지금 당장 행위를 멈추고 진리에 눈을 돌려야 한다.

놀이(예술)만이 어떠한 행위도 아니다. 그 무용한 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낙서 452. 생태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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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신학

 

자본주의 체제 대하여 맹렬한 비판을 가하는 이유는 생태신학의 구축을 위해서다.

생태계의 혼란은 인간(생명)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

생태신학은 단순히 자연보호 캠페인이 아니다.

생태신학은 생존의 문제이고, 생활방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생태신학의 구축은 자본주의 비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낙서 451. 경제적 불평등과 신학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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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불평등과 신학의 재구성

 

경제적 불평등은 유독 경제 분야에서만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못한 사회의 부조리를 보여준다.

경제 민주화를 가로 막고 있는 요인 중 하나가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것은 심각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기독교에게 주어진 과제 중 하나는 신학을 재구성하여 경제 민주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기독교는 자본주의와 함께 몰락하고 말 것이다.

그 어려운 일을 해 내는 '유시진 대위' 같은 기독교 학자들이 많이 생겨나길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