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읽는 낙서판

낙서 470. 선포(proclaim)와 포착(enlighte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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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포(proclaim)와 포착(enlightenment)

 

기독교의 메시지는 선포(proclaim)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인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truth)'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설득(persuasion)되는 게 아니라 포착(enlightenment)되는 것이다.

선포된 메시지 속에서 진리를 포착한 자는 구원 받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구원을 놓쳐버린 것이다.

구원을 놓쳐버리는 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

선포는 계속 되어야 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진리를 포착할 때까지.

나는 그 일을 위해서 부름 받았고,

그래서, 죽을 때까지 선포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낙서 469. 거룩한 산 제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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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산 제사의 삶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은 자기의 바깥에 있는 생명을 섭취해야 한다.

그래서 존재 자체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살아 있는 동안 이 피할 수 없는 폭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사는 게 윤리적인 삶이고 영성적인 삶이다.

다석 류영모는 그러한 삶을 위해서 예수를 믿은 후 평생 하루에 한끼만 먹으며 살았다.

그리고 나머지 끼니는 굶으면서 자기 살을 먹는 방식으로 폭력을 최소화했다.

다석은 이러한 삶의 방식을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산 제사'로 이해했다.

죽음이 인간에게 해방인 이유는

죽음을 통해 더 이상 육신이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의 바깥에 있는 생명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살면서,

남의 생명을 취해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만 골몰한 인간이 아닌,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어 다른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다른 생명에게 빚지고 있는 인간의 염치 있는 삶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살면서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생명을 해치는 일인가,

생명을 살리는 일인가에 대한 철저한 묵상과 반성이 필요하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낙서 468. 거듭난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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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남편

 

창세기의 타락 안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려 할 것이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거듭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려 할 것이다.

낙서 467. 사랑, 그리스도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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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리스도의 법

 

세상은 사람을 지배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그리스도는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세상을 따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들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 할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지배하는 법이 아니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배하는 법을 배운 자는 심판을 받고 망하려니와

사랑하는 법을 배운 자는 은혜 안에서 구원을 얻으리라.

낙서 466. 전복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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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의 아이러니

 

어떠한 일(그것이 사고든, 모함이든, 오해든, 슬픔이든, 고통이든)에 희생을 당하고 나면, 존재의 무력함을 느낀다. 정말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존재는 무력함을 느끼는 것에서 삶을 종결 짓지 않는다. 희생당한 존재는 그 무력함 속에서 죽을 힘을 다해 탈출하여 새로운 세상을 연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상을 아낌없이 나눈다.

이 세상은 희생당한 이들의 용기 덕분에 새로워지고 더 살 만한 곳이 된다.

그러므로 희생자는 희생자로 남지 않고 결국 승리자가 된다. 희생자가 승리자가 되는 순간 가해자는 패배자가 된다. 세상은 이렇게 전복되는 아이러니를 통해서 진보한다.

그러니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그리고 차였다고 너무 절망하지 마라. 세상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낙서 465. 초긍정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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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긍정의 신앙

 

기독교 신앙만큼 초긍정의 신앙이 또 있을까?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처음 선율처럼, 인생은 불안과 고통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지만,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끝나는 허무가 가득한 것 같지만,

불안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이겨내는 부활과 최후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불안과 고통,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가 기독교 신앙인에게는 존재한다.

죽는다 할지라도 그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

그 믿음을 감당할 만한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

마귀의 손에 들린 최후의 무기가 죽음이라면

하나님의 손에 들린 최후의 무기는 부활이다 (이것은 마귀에게 없는 무기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인은 최후 승리를 믿는다.

낙서 464. 생명과 등가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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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등가의 가치

 

무엇을 위해 생명을 소진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생명을 소진할 가치가 있는가?

생명과 등가의 가치를 지니는 일에 생명을 소진하지 않으면,

생명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비참한 일이다.

낙서 463. 기브 앤 테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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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브 앤 테이크

 

Give and Take,

요즘 사회는 이렇다. 서로 주고 받을 게 없으면 별로 관계 형성이 잘 안 된다.

내가 여러 가지로 가진 게 별로 없어서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렇다 보니, 상대방에게서 무엇인가 바라는 것도 없다. 주는 것도 없으면서 바라는 것만 있으면 욕심쟁이니까.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주는 것도 많으니 받는 것도 많은 것 같다. 그런 사람은 소위 인간관계가 넓다.

관계가 힘인 세상인데, 그래서 가진 게 없는 사람은 힘도 없다.

그래도, 힘 없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서로 주고 받다 보면, 그래서 인간관계가 넓어지다 보면 피곤해지는 일도 다반사다.

힘이 좀 없더라도, 피곤한 삶보다 소박한, 때로는 지루해 보이는 삶이 영혼에 좋다.

그래서 나는 요즘 가진 게 별로 없는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낙서 462. 개신교인이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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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이 되려면

 

개신교인이 되려면,

좀 똑똑하고 용감하고 부지런해져야 한다.

개신교인은 자신의 구원을 누군가의 손에 맡기지 않기 때문이다.

개신교인은 자기의 '양심'에 따라 신앙을 한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자유의 자리'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고백하고 실천하는 자유는 '양심'에서 온다.

그 누구도 개인의 자유가 자리잡고 있는 양심을 조작할 수 없다. 하나님도 인간의 양심을 조작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무한한 책임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이러한 양심을 보호하는 법을 정의로운 법이라 한다. 인간의 이러한 양심을 조작하는 법을 불의한 법이라 한다.

우리가 정의로운 법에 의해 우리의 양심을 보호받는 이상,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올바르게 쓸 줄 아는,

똑똑하고 용감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양심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손에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맡기는 무기력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거니와, 그러한 끔찍한 일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낙서 461. 즉자, 대자, 그리고 즉자적 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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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자, 대자, 그리고 즉자적 대자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독일어를 우리말로 옮겨 놓은 것인데, 우리말도 외계어처럼 들린다. 즉자는 독일어의 ‘an sich’를 옮긴 말이고, 대자는 ‘für sich’를 옮긴 말이다. 그리고 즉자적 대자는 ‘an und für sich’를 옮긴 말이다. 즉자는 자기 자신을 향하는 존재의 동일성이고, 대자는 타자를 향하는 존재의 분리성이다. 그리고 즉자적 대자는 자신과 타자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헤겔은 즉자, 대자, 그리고 즉자적 대자의 개념을 가지고 삼위일체성을 논한다. 즉자는 성부 하나님의 일이고, 대자는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의 일이고, 즉자적 대자는 성령 하나님의 일이다. 헤겔은 이것을 정신이신 하나님이 자기 분화, 분리, 복귀의 과정을 이루는 삼위일체로 파악했다.

 

이것은 정반합의 삼단논법의 반영인데, 결국 즉자와 대자가 즉자적 대자에게로 모아지는 것을 말한다. 헤겔은 정신이 분리와 차별(구별)의 상태에서 다시 자신과 연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과정을 화해라 부른다. 그렇게 화해된 정신은 정신적 공동체 안에 현존하는데, 그 정신은 성령이라 부르고, 그 공동체는 교회라 부른다. 그래서 교회(공동체)는 성령의 공동체이다.

 

대립되어 있는 것이 하나의 정신으로 통일되는 것은 흡사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만물의 통일’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헤겔의 하나의 주체나 에베소서의 ‘만물의 통일’은 언제나 각 존재의 고유성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비판에 직면한다. 단일성(unity)을 강조하면 개별성(diversity)이 깨지기 때문이다. 개별성의 기반은 자유이다. 개별적인 존재의 자유를 지키면서 단일성을 말할 수 있을까?

 

교회는 하나(unity)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가 되기 위해서 각 개별적인 존재는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자유를 희생해야 하는 것일까? 자유의 희생 없이 하나(unity)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반대로 개인의 자유를 지키려고 할 때 공동체의 하나(unity)됨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글을 써 놓고 보니, 이것도 말인지 방구인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