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읽는 낙서판

낙서 410. 기독교 신앙과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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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과 법

 

수사와 기소와 재판은 법리를 가지고 해야지 기분에 따라서 하면 안 된다. 그것이 법 정의이다.

신앙생활도 법리를 가지고 해야지 기분에 따라서 하면 안 된다. 그것이 신앙의 정의(justice)이다.

성경은 온통 법적인 용어로 가득한 하나의 법전이다.

우리는 그것을 Divine Law라고 부르지만,

사람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성경이 신앙을 법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는 잘 깨닫지 못한다.

개신교 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칭의' 개념도 법적인 용어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구원을 법적인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것은 하나의 메타포이다.

예수 사건과 구원을 반드시 법적인 용어로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 같은 경우는 사랑의 개념으로 예수 사건과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이 사적인 영역의 사건을 넘어서는 공적인 영역의 사건이라면, 바울이 취했던 법적인 용어로 예수 사건과 구원을 설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결국 신앙은 법의 문제이다.

선진국은 단순히 기술이 발달한 나라가 아니라 법이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고 법정의가 살아있는 나라를 의미하듯이,

선진 신앙은 결국 법에 관한 문제로 귀결된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영성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법이 허술하니 신앙생활이 사적 감정의 영역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도 법리를 가지고 다투지 못하고 감정 싸움에서 끝나는 이유도 법의 부재 때문이다.

나는 개신교의 신학과정에 법학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수의 목회자들이 신학을 공부하면서 법을 공부하고, 신학학위 과정과 더불어 Law School 과정을 이수한 목회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은 민주주의의 근본 토대이다.

교회가 민주화되려면 촘촘하고 유연한 법 정의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는 기본이 너무 약하다.

낙서 409. 일용할 지식과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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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지식과 지혜

 

어제 먹은 밥 때문에 오늘을 사는 게 아니라, 오늘 먹은 밥으로 오늘을 사는 것처럼,

어제 배운 지식, 또는 어제 깨달은 지혜로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배운 지식, 또는 오늘 깨달은 지혜로 오늘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듯, 일용할 지식과 일용할 지혜를 매일매일 간구해야 한다.

낙서 408. 계몽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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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자유

 

계몽의 모토는 'Sapere aude!'이다. 영어로 하면, 'dare to know'이다. 이것은 다른 이의 지도 없이 오성(지성)을 사용하려는 용기와 결단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계몽주의가 중요한 이유는 계몽 운동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서 누군가의 지도나 도움 없이 스스로 오성(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쟁취했기 때문이다.

특히, 서구사회에서 계몽 이전의 사회는 교회(교황)나 왕(군주)의 지도 아래에서만 오성(지성)을 사용할 수 있었다. 즉,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오랜 신학공부 후, 나름대로 깨달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궁극적인 구원은 '계몽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가져다 준 계몽의 자유는 없어지고, 교회는 또다시 인간의 생각을 옭아맸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갖는 최고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몽의 의미(구원)를 다시 일깨운 것이다.

그 전통에 서 있는 개신교는 계몽을 밀고 나가야 하지 후퇴시키면 안 된다. 계몽을 밀고 나가는 것이 예수 정신이다. 계몽을 후퇴시키고 있는 한국 교회는 인간에게서 구원을 빼앗는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낙서 407. 가장 선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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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선한 일

 

가만히 앉아 숨쉬기

그냥 가만히 있기

ㅡ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

낙서 406.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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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나는 방언으로 기도한다. 기도가 깊이 들어갔을 때 터져나오는 방언은 영혼을 참 시원하게 해 준다.

그러나, 내 진짜 방언은 성경을 통해, 이 세계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을 나의 언어로 풀어내는 글이다.

방언은 언어의 새로운 경험이다.

낙서 405. 교회의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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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목표

 

교회의 목표는 없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니라"(요 3:30).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교회는 쇠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그 왕위를 아버지 앞에 겸손하게 내려놓으시는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물러나야 한다.

교회는 없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세상이 오면, 교회는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사망과 애통과 곡과 아픈 것이 있는 한, 그것 때문에 우는 자들과 함께 존재해야 한다.

"나는 사라지기 위해 존재한다." 이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다.

마땅히 사라져야 하는 존재에게 무슨 권력과 부가 필요할까.

낙서 404. 내 등에는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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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등에는 무엇이?

 

무엇을 등에 지고 가면서 그렇게 힘들어하는가? 십자가인가, 우상인가?

낙서 403.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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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위험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세상이 위험하다고 손가락질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짐승인지를 자신과 세상에 선언해야 한다.

낙서 402. 학교에서 농업을 가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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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농업을 가르쳐야 한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 Utopia>에 이런 구절이 있다.

 

“농업은 남녀노소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배우는데, 한편으로는 학교에서 이론을 배우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까운 농장에 견학을 가서 실습을 통해 배웁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농사일을 하는 외에 각자 자신의 일을 한 가지씩 더 배웁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이 시대의 교육을 생각해 본다. 초,중,고 과정에 농사를 가르치는 학교는 없다. 그러나 이 시대의 교육도 농사(농업)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먹고 사는 것, 땅에 대한 것, 환경에 대한 것의 감사를 알게 될 것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도시가 형성되고 사람들의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생명에 대한 가치는 그때부터 형편없어졌다. 인간소외는 사람이 땅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발생한다. 농사와 땅의 가치를 아는 데서부터 생명의 가치는 회복될 것이다.

 

개발 전 강남,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1980년대 이후 급격하게 개발된 강남의 도시에서 살며 어린 시절 경험한 농촌의 추억을 모두 잃어버리고, 이제 자기 손으로 농사 짓는 일을 잃어버리고, 봄이 오면 온 땅을 뒤덮었던 나물들의 이름을 모두 까먹은 나 자신을 한탄한다.

 

학교에서 농사(농업)을 가르쳐야 한다는 내 생각도 토머스 모어의 생각만큼 유토피아적인 생각에 불과한 것일까.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결국 땅을 더럽힐 뿐이고, 쌀 한 톨 생산해 낼 수 없다는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낙서 401. 사회복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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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음운동

 

Social Gospel Movement(사회복음운동)을 보면서 드는 생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교회가 죽어야 하나님 나라가 산다."

 

사실, 그렇다.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 제기된 문제는 이것이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는데, 이 세상에 온 것은 교회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신학적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데서 오는 병폐이다. 우리는 중세시대에 그 병폐를 볼 수 있는데,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동일시되면 교회권력에 의해서 대중들은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억압당하고 만다. 그리고, 사회문제는 내동댕이쳐지고 만다.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교회에 등록된 신앙인이라면 사회가 어떻게 되든, 이미 구원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사회복음운동(신학)은 그런 점에서 교회신학을 비판하여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분리하여 좀 더 넓은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게 하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회문제로 시선을 돌리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사회복음운동의 큰 공헌이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역사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신학적 논점이다. 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과학의 발견과 발전, 그리고 사회과학의 발견과 발전과의 대화를 통해서 풀어 나가야 한다. 21세기 교회는 전통적인 교리를 앵무새처럼 주장하는 것을 통해서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