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읽는 낙서판

낙서 490. 낙심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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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마오!

 

도산은 병환으로 죽어가며 자신을 문병 온 동지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낙심마오!"

그 당시 한국인은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의 길은 아득하고 일제의 탄압은 날로 심해졌기 때문이다. 1938년의 일이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낙심마오'라며 위로를 건네고, 생명이 다해갔지만 끝까지 절망하지 않고, 민족독립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스스로 낙심하지 않았던 도산은 어떻게 그러한 신념을 가질 수 있었을까?

 

도산은 성경을 즐겨 읽었다. 그는 때때로 교회의 신자들 앞에서 설교할 정도로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러한 도산의 이력을 토대로 추축해 보건 데, 도산은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마음 속에 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6).

 

진실로 선을 행하고 있다면 낙심할 필요 없다. 도산은 이렇게 말했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낙심마오!" 성경을 사랑했던 도산 안창호, 그는 숨을 거두면서까지 낙심하지 않았다. 낙심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고 일을 그르치는 것도 없다. 무슨 일이든, 낙심만 하지 않는다면,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 낙심하지 말자.

낙서 489. 슬픈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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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슬프고 우울하다.

그것의 색깔은 블루이고

그것의 문지기는 야누스다.

야누스는 평화 시에는 문을 닫고

전쟁 시에는 문을 열어 둔다.

자본주의 세상은 전쟁터이다.

문지기 야누스는 좀처럼 문을 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쉼이 없는 이 세상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모두 피곤하다.

피곤하니

모두들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자본주의는 서로 슬프고 우울하다.

낙서 488. 자유는 신기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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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신기루인가

 

“사람들은 자유가 진정으로 가치 있게 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사회적/경제적 조건들을 창출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유 자체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ㅡ 권보드래 논문, <실존, 자유부인, 프래그머티즘>에서

 

유명한 문장이라는데, 정말 훌륭한 통찰이다.

자유의 가치는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이 뒤따라 주지 않으면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유를 보장 받기 위하여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갖추기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불태운다. 그런데, 정작, 자신에게서 자유가 사라진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노예처럼 산다.

이 아이러니, 이것이 현대인들이 겪는 아이러니다.

자유는 신기루인가.

낙서 487. 정말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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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괜찮아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ㅡ 하재연 시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중

 

정말 괜찮아. 그러니, 너의 삶을 살렴.

낙서 486. 개인과 자유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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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자유와 교육

 

근대 이후,

'개인'이 발견되면서 공동체의 의미가 쇠퇴했다. 개인이 발견되면서 개인의 자유는 증가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개인이 발견되기 전, 개인은 공동체에 매몰되어 개인의 존재감 없이 공동체적인 존재로 존재했지만, 이제 개인이 발견된 후부터 개인은 공동체와 거리를 두며 공동체에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며 공동체의 참여와 자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개인이 삶의 자리를 스스로 결정하게 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나, 그만큼 인생의 고민 또한 늘어났다. 개인과 자유가 제 힘을 발휘하려면 '교육'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서 근대사회에서 교육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교육 없이 개인과 자유의 가치는 오래 지탱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과 자유의 가치가 늘어난 만큼, 개인의 생존의 문제도 개인에게 책임지어 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다른 개인과 경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 사이 교육은 개인과 자유를 지탱해주는 원리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생존을 지켜주는 도구로 전락했다.

 

개인과 자유가 발달될수록 ‘경쟁’은 불가피하다. 이게 참 아이러니한 것이다. 개인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통해 다른 개인을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개인을 경쟁 상대로 간주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통해 상대방을 무너뜨린다. 즉, 개인의 존재가 자유를 통해 부각될수록 평화와 평등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억압과 폭력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가 발견한 개인과 자유에 어떠한 문제점이 존재하는 것일까? 근대가 발견한 개인과 자유는 어떠한 것이길래 사랑과 평화를 증가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억압과 폭력을 증가시키는 것일까? 나는 이게 참 궁금하다.

낙서 485. 교회는 사색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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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사색을 허하라

 

"신학은 오늘날 과학과 살아 있는 교류를 해야 한다... 삼위일체 사유(신학)는 유동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한 것이 아니고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도상의 신학(theology on the way / theilogia viatorum)이다."

ㅡ 테드 피터스, <God as Trinity>

 

그러므로 교회는 사색을 허하라.

낙서 484. 사람 사이에 평화는 어떻게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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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에 평화는 어떻게 오는가?

 

상대방의 인격의 주체성을 100% 인정하고 보장할 때 온다.

이것은 사랑할 때만 가능하다.

평화는 사랑할 때만 온다.

낙서 483. 바르트의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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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의 공헌

 

하나님이 삼위일체적이란 말은 그리스도 사건 안에 계시된 사실을 떠나서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진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르트의 공헌이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합하는 전체가 되는 것이다.

낙서 482. 대단한 인간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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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인간의 능력

 

인간은 참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것 같다. 숫자가 실제 유통되는 재산이라고 믿고, 종이로 만든 현금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줄 아니 말이다. 현대인들이 '재산'이라고 믿고 의지하는 것은, 실제로 허상이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허상을 믿고, 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니, 이보다 더 놀라운 능력이 어디에 있는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체 중 이런 능력을 지닌 생물체가 어디에 있는가.

낙서 481. 삼위일체론에 대한 슐라이마허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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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에 대한 슐라이마허의 생각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교의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에 대한 직접적 표현이라기보다는, 이 표현들을 조합한 것에 불과하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삼위일체론은 신앙의 원초적 증언이 아니다. 이 교의는 원초적 계시(신론, 기독론, 성령론 등)의 여러 요인들을 함께 묶거나 종합하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그는 삼위일체론이 기독교 신앙고백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삼위일체론을 그의 책 <그리스도교 신앙 The Christian Faith>의 맨 마지막에 부록처럼 끼어 넣는다.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생각을 깬 신학자가 칼 바르트이다. 바르트는 삼위일체 교의의 근거 혹은 “뿌리’가 성서 속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말한다. 삼위일체 사유는 이미 거기 있었던 것에 대한 분석이지, 새로운 어떤 것을 구성하는 여려 요인들의 종합이나 화해가 아니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접근법을 근거로 볼 때, 슐라이어마허와 바르트는 완전히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다.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 발전된 자유주의 신학자였고, 바르트는 그것을 벗어난 신정통주의 신학자였다. 슐라이허마허는 성서의 역사비평 아래 성서의 권위가 떨어진 시대를 살았고, 바르트는 성서의 역사비평이 가진 허점을 파악한 성서의 권위를 다시 찾은 시대에 살았다. 이 둘의 근본적인 차이는 성서의 권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르트는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로 보았고, 슐라이허마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성서와 하나님의 계시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손가락 자체는 아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무지막지한 문자주의로 빠지고 만다.